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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의 예배적 삶이 무엇인지 본회퍼의 위임사상을 참고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교회와 정부가 일치했던 종교개혁 이전에는 예배생활(교회)과 사회생활(직업)에 대해서 무엇이 세속적이고 무엇이 성스러운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부와 교회가 분리되면서 예배생활과 사회생활에 대해서 신학적인 정립이 필요했습니다.
 
마틴루터가 “삼대권 주권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삶과 예배에 대해서 성경적 관점을 정리했지만 사회 질서를 너무 절대화하려는 오류에 빠졌습니다. (여기서는 삼대권 주권사상에 대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본회퍼는 루터의 영향을 받았지만 삼대권 사상의 오류를 고려하며 인간 사회질서의 구조를 제시했습니다. 그것을 본회퍼의 “위임사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배척하고, 사회를 네가지 영역(노동=일터, 결혼=가정, 정부, 교회)으로 나누어 하나님께서 그 영역들을 인간에게 위임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위임자의 역할을 할때 이 모든 영역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재료가 된다고 말합니다. 본회퍼의 위임사상을 요약하며 그리스도인이 일상 속에서 예배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먼저, 예배자의 삶의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예배자의 태도 1. 바로 오늘, 여기, 우리 사이에서
 
본회퍼는 추상적인 위임을 거부하고 구체적으로 “오늘, 여기, 우리 사이에”라는 존재론적 개념을 수립하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위탁에 순종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우리에게 주신 노동(일터), 결혼(가정), 정부,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구체적인 위임의 현장임을 인정하고 그 영역에서 열심히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흥미롭지 않더라도, 눈에 보이는 보상이 없더라도, 그저 하나님께서 맡겨 주셨으니깐 땀을 흘리는 것, 그 수고는 열심이기 전에 "순종"입니다. 그러한 자세로 바로 오늘, 각자가 있는 곳에서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예배자의 첫번째 태도입니다.
 
예배자의 태도 2.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되는 궁극적인 세계를 열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영생' 혹은 '천국' 등의 단어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적/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입니다. 즉, 언제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통치(말씀) 안에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영생)를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땅에서의 삶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구하며 따르는 것이 예배자의 두번째 태도입니다.
 
예배자의 태도 3. 타인을 섬기며
 
우리는 일터, 가정, 정부, 교회에서 하나님의 위임자로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권위는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우리는 그 권위를 위임받은 자로서 위임하신 분의 목적에 맞게 대리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역할은 타인을 위해 책임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타인을 위한 섬김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인간이 하나님과 협동하는 동시에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즉,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 물질, 재능을 활용하여 타인을 섬기며 사는 것이 예배자의 세번째 태도입니다.
 
예배자의 태도 4. 동등하게 존중하며
 
일터/학교(노동), 가정(결혼), 국가(정부), 교회 각 영역은 고유한 특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 중에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배할 수 없고, 하나만 부분적으로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 전문 직업을 가졌다고 스스로를 좋게 봐서도 안되고, 누군가 단순 노동을 한다고 해서 스스로를 낮출 필요도 없다. 가정에서의 역할이 다를수는 있지만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 정부를 관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특권층이라고 여겨서는 안되며,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은 특별한 성직 의식을 가져서도 안된다. 이 모든 영역은 동등하면서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각기 다른 직분과 같은 것이다.
 
한 사람의 삶 속에서도 이 네가지 위임의 영역(일터/학교, 가정, 국가, 교회)이 동시에 존재하며 상호 의존적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일터/학교에서의 노동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이는 결혼(가정 생활)을 더 중요하게 여기곤 한다. 어떤 이는 정부(정치 사회적 활동)를 더 중요시 하고, 어떤 이는 교회(직접적인 종교 활동)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도 한다. 사람마다 주요하게 주어진 위임에 따라서 그 정도는 다르겠지만 네가지 위임 중에 어느 하나를 우위에 놓고 더 중요하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여기는 것, 그리고 각자의 삶의 네가지 영역(일터/학교, 가정, 국가, 교회)에 있어서 균형있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예배적 삶의 네번째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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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제 네가지 위임의 영역(일터/학교, 가정, 국가/사회, 교회)에 대해서 좀더 살펴봅시다.
 
예배의 처소 1. 일터/학교에서
 
노동은 인간이 창조행위에 참여함을 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같이 무에서의 창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처음 창조에 근거를 둔 재창조입니다.
 
에덴동산으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창세기 2장에서는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그에게 땅을 경작하도록 시키신 것입니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시던 날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Abad)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 2:4-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Abad) 지키게 하시고 (창 2:15)

 

여기서 2장 5절에 등장하는 “땅을 갈다”와 “경작하다”에 사용된 히브리 단어 ‘아바드(Abad)’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배의 기원이 되는 다섯개의 단어가 등장합니다. “엎드려 절하다”(신26:10)는 의미의 히브리어 ‘샤카(shachah)’, “존경의 표시로 엎드린다”(마 14:33)는 의미의 헬라어 ‘프로스퀴네오(proskyneo)’,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제사”(롬12:1)라는 의미의 헬라어 ‘라트레이아(latreia)’, "주를 위해서 무엇을 한다"(행 13:2)는 의미의 헬라어 ‘레이투르기아(leitourgia)’, 그리고 "섬기다, 일하다"(창2:5,15)는 의미의 히브리어 ‘아바드(Abad)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만드신 땅(에덴)에 일할 사람(아담)을 세우셔서 그가 땅에서 일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동역자로 부르셔서 인간의 노동을 통해 자신의 창조활동을 완성해 가셨고 아담의 일은 그 자체가 예배가 되었던 것입니다. 공의회에서도 인간이 노동을 통해 구속 사역에 동참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터전(일터/직장/학교)을 주셨고, 우리를 일터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일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그 목적에 맞게 일할 때에 그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처소 2. 가정에서
 
인간은 결혼이라는 창조질서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됩니다(엡 5:22). 또한 자녀를 낳고 양육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적인 역사에 동참합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위탁받은 출산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교육자, 또한 자녀를 잠시 맡아 기르는 대리자입니다. 
 
결혼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몇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1) 일부일처제의 원칙입니다. 성경에서 그것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런 경향을 보여줍니다. 즉, 결혼은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맺는 관계의 위임이라는 것입니다. (2) 항구성의 원칙입니다. 그것은 결혼이 죽음만이 갈라놓을 수 있는 생애적인 위임이라는 것입니다. (3) 신실성의 원칙입니다. 결혼은 단순한 사랑의 감정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르는 신실성(책임)을 동반해야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4) 아가페 사랑의 원칙입니다. 그것은 관심과 신뢰, 협동, 정의, 그리고 용서를 포함하는 사랑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정을 이루고 지킬때에 가정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처소 3. 국가/사회에서
 
이 복잡한 사회 속에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영역입니다. 본회퍼에 의하면 정부(정치적 위탁)는 노동과 결혼의 위임을 전제로 합니다. 정치적 위탁은 그 자체가 생명이 있거나 창조적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창조를 이루어 가시는 두가지 위임(노동, 결혼)을 이해하고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법을 제정하고 그 법을 어떤 구조 속에서 지킴으로써 창조 세계를 보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치적 권위가 결혼(가정)과 노동(직업)의 가치 앞에 와서는 안됩니다. 결혼와 노동이 파괴되면 결국 정부도 파괴될수 밖에 없습니다. 본회퍼는 정치적 권위가 주어진 위임적 한계를 넘어 그 자신의 권위를 주장할 때에는 정치적 귄위를 상실한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정부가 하나님의 질서 안에 있다면 개인은 거기에 충성과 봉사와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때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참여를 통해 정부가 하나님의 위탁 안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노력할 책임이 있습니다.
 
예배의 처소 4.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교회에서의 활동은 당연히 예배와 관련되어 인식되기 때문에 마지막에 넣었습니다. 교회의 위임은 다른 영역의 위임에 모두 영향을 주면서 이중적 대리를 수행합니다. (1) 첫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적 장소로서 존재합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서 예수님의 몸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의 구세주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교회 자체의 존재를 위해서 협력적으로 봉사할 책임이 있습니다. (2) 둘째, 교회는 창조의 목적을 실행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현실을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질서를 유지하며, 기독교인의 생활이 이 땅에 실현되도록 합니다. 이를 위해서 설교와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형성된 공동체(교회)는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선포하며 창조의 목적이 이 땅에서 완성되도록 땅을 섬기는 역할을 합니다. 성도들이 이러한 교회의 역할을 지킬때에 교회는 진정 예배의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상 본회퍼의 위임사상을 참고로 하여 예배적 삶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