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이 고백하는 것 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그리스도로 옷입은 "새 자아"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뭔가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행위"적인 접근이 아니라 무엇이 되었다는 "존재"적인 접근이기 때문에 이해하고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특정한 영역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현상을 살펴볼수는 있을 것입니다.
학문의 영역을 살펴봅시다.
이번 코스타에서 강의를 맡은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많이 배울수록 이웃을 섬길 기회가 많아집니다. 그러니 여러분들 공부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이에 대한 몇몇 참석자들의 반응을 들으면서 그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고학력자의 머릿속에 있었을 법한 생각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래, 맞아. 많이 배우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그만큼 어려운 이웃을 섬길 기회도 많아지는 거야. 그래, 그런 면에서 내가 지금 하는 공부는 중요하고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는 거야. 열심히 공부해서 이 학업과 연구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아야겠어.”
좋은 표현이지만 이 속에는 하나님을 긍정하기에 앞서서 "자기"를 긍정하고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현상 위에 성경적 가치를 부여하는 위험입니다.
반면에, 어떤 목사님께서 CS루이스의 “전시의 학문”을 인용하면서 하신 아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베토벤이 하는 일과 파출부의 일이 둘다 하나님께 하는 일이라면 동일한 무게를 가집니다. 그러면 현재 하고 있는 일이 학문이라면 그것을 하나님께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먼저 학문적인 도출(결과)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기여한다는 생각은 말아야 합니다. 대신 지식과 미를 그 자체로 추구하되 그것을 추구할 관심과 욕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인정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지속할때에 직간접적으로 하나님께로 이끌리게 됩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주어진 학문이 하나님의 일인지 아닌지 너무 고민하지 마시고 지적인 추구를 지속하시기 바랍니다. 너무 고민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관심에 충실하는 겸손한 자세이다.
하지만 언젠가 학문을 추구하고 있는 당신의 마음속에 그 학문이 당신의 것이고, 당신이 키워야 한다는 (당신의 능력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을때, 혹은 그것으로 인해 부나 명예나 안락함을 추구하고 있는 당신을 발견할 때에 그 학문추구는 위험한 무기가 될수 있습니다. 그런 위험에 직면하게 될때는 학문활동을 잠시 중단해야 합니다.
이 속에는 무엇을 긍정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관심사와 그것을 이끌어 가시는 분(하나님)을 긍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부정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오용할 수 있는 자신(인간)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좋은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관심과 달란트를 따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옛 자아"에 사로잡히지 않는 균형잡힌 자세인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의 상태를 말합니다. '나'라는 주어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라져 가고 예수가 주체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시작이 예수요, 과정이 예수요, 결과가 예수가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고, 돌려받을 것도 없습니다. 또한, 언제든지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사는(성취) 것도 유익하지만 죽는(실패) 것도 유익하게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가치 앞에서 재해석 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