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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K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해서 이중적 책임을 가집니다. 첫째, 세상속에 살고, 세상을 섬기며, 세상에서 증인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을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도피해서는 안됩니다. 둘째, 세상에 참여하지만 세상에 오염되지 않는 것이빈다. 즉, 세상에 순응해서도 안됩니다.

 

먼저, 도피주의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기독교신앙을 지키기 위해 따로 공동체를 이루어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개신교 수도원이 있습니다. 성경적 정신과 문화를 지키며 사는 그분들의 모습이 귀감이 되지만 세상에서 도피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또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문화에만 익숙한 나머지 사회에 잘 적응을 못해 사회로부터 도피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기독교인의 모습에 “도피주의”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붙여볼 수 있을것 같습니다.

 

문제는 순응주의

 

그런데 우리는 도피주의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의 도피주의적 모습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순응주의”일 것입니다. 잘못된 사회 문화와 가치관에 대한 맹목적인 순응 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의 문화와 사상에 순응하며 “하나님이 없는 듯이” 살때가 많았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벌하셔서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역사는 하나님 “없음”과 하나님 “있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세상의 문화와 이방 종교라는 다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최근에 저 자신과 주변의 기독 청년들을 보면서 섬뜻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모두들 이 사회가 점점 타락해져 간다고 이야기 하지만 우리는 과연 이 사회 속에서 얼마나 “구별” 되었는가 생각해 볼때 그다지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열광하는 것에 똑같이 열광하고, 사회가 추구하는 것을 똑같이 추구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성경이 아니라 사회가 맞다고 하는 길을 똑같이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톨스토이가 참회록에서 이야기 하는 것과 같이 대다수의 교육받은 이들의 믿음은 “예수”가 아니라 “진보”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거부해야할 사회의 풍조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존스토트는 그의 마지막 저서 "제자도"에서 다원주의, 물질주의, 윤리적 상대주의, 그리고 나르시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거부해야 할 현대 사회의 풍조 1: 다원주의

 

현대인은 누구나 다원주의 사회에 직면해 있습니다. 먼저, 다원주의는 "다양성"과는 다른 것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원주의 안에서 종교다원주의를 고민해 보고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해서 도전 합니다. 실제로 미국의 대부분의 신학교들은 보수적 복음주의에서 벗어나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고 있고, 몇몇 신학교는 상대성을 존중한다는 취지에서 아예 다원주의 신학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예수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각 종교 나름대로의 구원의 길이 있다는 보편성/상대성을 주장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종교 다원주의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의 트윌치(종교 사학자), 토인비(역사학자,신학자), 칼 융(심리학자)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이런 종교다원주의의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을 다음의 네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1) 보수 배타주의(복음주의), (2) 개방적 복음주의 (3) 포용주의, (4) 다원주의.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 글에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섬겨왔던 어느 분께서 저에게 그런 질문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지인중에 행실이 바른 이슬람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도 자기가 믿는 알라신을 통해서 구원 받는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너무 착한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이 없는 기독교는 진리가 될수 없습니다. 

 

이 종교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답을 가지는 것은 너무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임을 잊지 말하야 할 것입니다.

 

거부해야 할 현대 사회의 풍조 2: 물질주의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6:19). 바울은 자족하기를 배웠고, 그것이 유익함을 알았다고 고백했습니다 (빌 4:11-12).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있고, 잠언에 등장하는 당대의 지혜자 아굴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지키기 위해 늘 필요한 만큼의 소유만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잠 30:8).

 

하지만 이 사회의 가치관은 반대입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오르고,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좋게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관은 교회 안에도 깊숙히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물질주의 사회 속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가지게 되는 무엇(재물, 지식, 지위)에 대해서 오히려 두려운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더 많은 소유가 우리의 육적 필요는 채워주지만 영적인 퇴보도 함께 가져올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물질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재물의 탑을 쌓지 않기도 선택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지식과 더 높은 학력의 산을 오르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참된 유익을 위해 보이는 유익을 거부하는 지혜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성취주의, 성공주의에 대해서 조금 더 언급하고 싶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취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종교적인 뭔가를 성공적으로 하면 하나님께서 쓰신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가치관입니다. 그러한 기독교적 성취가 고상한 헌신이나 순종처럼 보이지만 종이 한장 차이로 “죄”가 될수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요소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종교적으로 대단한 일을 해도, 심지어 대통령이 되어서 엄청난 영향을 끼쳐도, 하나님 앞에 우리를 더 의롭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한가지 의로움은 바로 예수의 보혈이라는 사실을 날마다 기억해야 합니다. 그 예수님의 의를 발견할 때 우리 안에 두텁게 입혀졌던 “자기 의”의 옷은 벗겨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언제 교회를 맡기시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승승장구 할 때였습니까? 그가 주를 위해서 생명이라도 바칠것 같이 호언장담 하던 때였습니까? 혹은 그가 주를 위해서 칼을 빼 들었던 그때였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셨을 때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며 배신했던 그 이후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가져갈 수 있는 의가 하나도 남지 않았던 그때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부르시고, 자신의 양을 맡기셨습니다. 베드로가 오직 예수의 옷을 입고 소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일들이나 소유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떠나거나 버릴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신 예배의 재료입니다. 또한, 아직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을 부인하는 것은 오히려 종교 극단주의나 근본주의 혹은 신사도운동 같은 다른 극단으로 빠지게 만들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20대까지는 복잡한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주어진 학업이나 일에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는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위에서 언급한 물질주의, 성공주의, 성취주의 등을 경계하며 하나님의 관점에서 날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거부해야 할 현대 사회의 풍조 3: 윤리적 상대주의

 

현대 사회에서는 도덕적인 기준들이 모호해 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만 해도 교육의 목표는 보편적인 도덕적 가치에 대한 신념을 길러주는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많은 경우에 윤리교육의 목표는 복잡한 도덕적 이슈들(예를 들어, 동성애)에 대해서 신중한 사고를 하는 방법을 길러주는 데 있습니다. “윤리란 결국 자의적인 것이다”라는 아브라함 에델의 말과 같이 사람들은 각자 옳은 기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얼마전에 보았던 정말 극단적인 한 기사가 생각납니다. 한 초등학생이 어머니를 살해했는데 왜 어머니를 죽였냐고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게 왜 잘못인가요?” 그 아이는 게임에 중독되어 죽고 죽이는 사이버 세상에 몰입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이버 세상의 기준이 현실에 그대로 적용된 사례입이다. 물론 극단적인 경우지만 우리 사회도 계속 이렇게 흘러가다 보면 남여의 성적 구분이 없어지고, 보편적인 옳고 그름이 사라지고, 그저 “다양과 존중”이라는 단어만 남을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인간이 각자 옳은 대로만 살아간다면 정말 끔찍한 사회가 펼쳐지지 않을까요?

 

거부해야 할 현대 사회의 풍조 4: 나르시즘

 

나르시시즘은 가장 다루기 어렵지만 가장 깊이 고민해야만 하는 문제인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참으로 존귀한 자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자기 사랑”은 어떤 것인가요? 이 사회는 온통 자기를 사랑하라고 외치는데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왜 나쁜 것인가요?

 

다원주의, 물질주의, 상대주의, 그 외에 수많은 세상의 왜곡된 풍조들은 이 “자기 사랑”에서 시작되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자기 사랑, 자기 긍정은 바로 죄의 근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던 아담과 하와에게 사탄은 속삭였습니다. “네가 할 수 있어! 넌 소중해! 네가 하나님 처럼 될 수 있어!” 그들은 이미 하나님 안에서 너무 소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꾀에 넘어간 그들은 더이상 하나님의 눈에 비친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에 비친 자신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인류의 비극인 "죄"가 시작된 것입니다.

 

현대 사회 속에는 “자기 사랑”의 가치관들이 가득합니다.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라! 자기를 돋보이게 하라! 재치 있게 행동하라!” 이런 말들이 좋은 것처럼 들려옵니다. 하지만 “자신을 다 내어주라! 지극히 작은 자가 되라!” 이런 성경적인 말들은 너무 어리석게만 보여집니다. 성경을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매여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말입니다.

 

자기사랑을 벗어나는 것은 훈련과 절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보다 훨씬 가치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예수를 사랑하는 풍요 안에서 자기 사랑이 가져다 주는 거짓된 풍요를 깨달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를 우리 삶을 지탱하는 실체로 초청해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는 참된 사랑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해결책

 

제자도 책에서는 이시대의 다원주의, 물질주의, 윤리적 상대주의, 그리고 나르시즘에 대해서 네가지 총체적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입니다. (1) 다원주의의 도전에 맞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옹호하는” 진리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2) 물질주의의 도전에 맞서서 “검소한 순례자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3) 상대주의의 도전에 맞서서 “순종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4) 나르시시즘의 도전에 맞서서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